상주제사공장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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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6월 5일 상주군에서는 3만 5천 원을 들여 전국에서 유일하게 ‘금촌식(今村式) 특별호 6단형 자동선회(自動旋回) 건견기(乾繭機)’를 설치한 ‘상주 건견장(乾繭塲)’의 낙성식과 시험 운전을 했다. 이 건견장은 누에고치 공동판매소 북쪽의 남성동 105번지 일대에 있었으며, ‘상주군농회’에서 운영했고, 1931년에는 ‘안등(安騰)제사공장’으로 재설립되었다.
1932년 3월 8일에는 양잠 본고장 상주에 규모 있는 제사공장 설립을 위해 ‘상주상공회’ 주관의 회합이 있었다. 이전에도 공장과 생산자를 총망라한 주식회사 설립 시도를 했는데 실패하였고, 이때 재시도를 위해 ‘앵옥여관’ 회장과 야마구치(山口), 미즈타니(水谷), 후쿠오카(福岡), 야마시타(山下) 등 수매 단체 간부가 모였다.
그러나 진척은 없었고, 그해 11월 19일에는 상공회장이었던 이나가키토쿠사부로(稻垣德三郞) 등이 ‘농잠학교’ 갑종 5년제 승격과 제사공장을 설립해야 한다는 진정서를 경상북도지사에게 제출했다. 지사는 학교 승격에는 경비가 발생하며, 제사공장은 대구의 3개 공장 수요가 부족해 신규 설립은 부적정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런 상황을 보면 이때 잠사업의 주도권은 이미 대구로 갔었다고 하겠다.
이 시기에는 연간 7, 8만 석을 조업하였고, 해방 후에는 더 줄어서 1만 7, 8천 관에 그쳤다. 이에 따라 원료와 자금난을 해결하기 위해 관리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어렵게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1949년에는 농림부에서 견(繭) 매상 구역을 변경함에 따라 조업량이 연간 8천 관은 확보돼야 하나 춘견(春繭) 중 하품 2천 관만 확보했을 만큼 생산량도 줄어들었다.
공장 대표는 1949년 유영한, 1955년 김찬곤으로 그 이전에는 확인되지 않는다. 명칭도 상주제사공장(尙州製絲工場)으로 나타난다. 이때 경영 곤란으로 대표와 명칭도 변경된 것으로 생각되며, 종업원은 40여 명이었다.
1955년 8월 15일에는 ‘재단법인 영남교육재단’에서 인수했으며, 연 생산량은 약 800관으로 줄어들고, 시세는 관당 3만 9천 환 정도, 직원은 50명 정도였다.
이 사진은 경영난을 겪을 1940년경 사진으로 높은 굴뚝과 ‘ㄱ’자형 비늘판벽의 목조, 박공지붕의 본 공장과 여러 채의 부속 건물이 보인다. 공장 뒤쪽 배경으로 천봉산 정상부와 자산이 보인다.
<사진 : 사진으로 보는 반백 년 전 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