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일 : 2020-02-19

이름과 노동력을 빼앗긴 다리(32)

후천교

기사입력 20-01-09 16:48 | 최종수정 20-01-09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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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후천교 건설을 완료하고 도교식을 거행하기 이전의 모습이다. 이 교량은 ‘궁민구제토목사업(窮民救濟土木事業)’으로 시행되었다. 이 사업은 세계공황으로 위기에 처한 일본제국주의가 식민지 지배체제의 안정화를 도모하기 위해 조선에 시행한 일종의 실업대책이다.


  이 사업을 위해 조선총독부는 1931~35년까지 5개의 년에 걸쳐 기채를 통해 총사업비 약 1억 원을 투입했다. 그중에서 75%가 대장성 예금부 자금이고, 나머지는 조선식산은행 차입금이었다. 사업비의 약 40%는 임금으로 사용되었으며, 1931~33년에 연인원 442만 7,914명이 동원되었다. 지방자치란 미명하에 도(道) 및 지방단체로 하여금 이 사업을 추진하게 하여 지방재정의 식민지적 종속을 심화시켰으며, 사업비 부담은 조선인에게 전가시켰다.


  후천교는 상주와 서울간의 1등 도로로서 다년간 지역 현안사업이었다. 도교식은 1932년 6월 16일 오후 1시에 개최되었다. 이 공사는 궁민구제사업비 2만5천원, 기타 1천3십원 총공사비 2만6천3십원이다. 1931년 10월 1일 기공하여 1932년 6월 16일까지 약 8개월 만에 완공하였다. 길이 110m, 폭 6m 규모로서 1제곱미터 당 40원의 공사비가 소요되었고, 연인원 1만1천명이 투입되었다.


  이 교량의 조선시대 이름은 ‘북천교(北川橋)’였으며, 일명 북쪽 5리에 있다하여 ‘오리교(五里橋)’라 하였다. 만산동 일대에서는 ‘영빈관(迎賓館)’이 있어 ‘영빈관다리’라고도 한다. 원래는 석축으로 쌓은 무지개다리, 즉 홍교(虹橋)였다. 그러나 1719년 이전 을해년(乙亥年) 수해로 홍교가 파괴되었고, 그 후에는 나무 널판을 이용한 판교(板橋)를 놓아 통행을 했다.


  이 교량이 건설되면서 북천교에서 후천교로 이름이 바뀌었고, 일제강점기 세계공황에 따른 식민지 지배 안정을 위해 토목사업 명목으로 조선인을 수탈한 현장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사진 : 부산일보>

김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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